사랑하는 나의 똘이 2
불행의 시작 – 나의 잘못된 산택
“똘이! 똘이야! 똘!”
똘이는 온몸을 버둥거리다가 네 다리를 쭉 뻗고는 눈동자가 허옇게 뒤집힌다.
“또~올! 그만해, 제발 좀!”
어떻게 진정시키려고 해 보지만 방법이 없다.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이름만 불러 본다.
근래 들어 한 주에 두어 번씩 발작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가슴만 답답해질 뿐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아줌마도 옆에서 덩달아 발만 동동 구를 뿐.
“안되겠다. 병원에 가 보자. 케이지 가져와!”
“병원에서도 별 방법이 없다 그랬쟎아요?”
“그래도 어떻게 그냥 지켜봐? 진정제 같은 거라도 맞히든가. 내가 못 견디겠잖아!”
버둥거리는 놈을 케이지에 넣고는 집을 나선다. 병원까지 꽤 멀다. 택시를 타야 한다.
아줌마도 허겁지겁 뒤따라오면서 거의 울 지경이다.
민박에 오는 손님들도 모두 똘이를 예뻐했다.
처음 오는 손님에게도 짖지 않고 꼬리가 떨어져라 흔들며 반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국말을 하는 사람이 오면 어김없이 짖어 댔다.
아마 한국말에 익숙해져서 중국말은 이상하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똘이랑 재밌게 5년 정도 지내다가 2014년 이사를 하게 되었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이 회사 경영을 좀 도와 달라고 해서 롄윈강으로 가게 되었다. 민박을 접고 똘이랑 모두 이사를 하는데 이동하는 것이 문제였다.
우리나라는 어떤지 모르지만 중국에서는 개를 버스 좌석에 절대로 태우지 않는다.
티켓을 한 장 더 사도 안된다. 짐칸에 태워야 했다.
할 수 없이 똘이를 케이지에 넣어 짐칸에 싣는 수밖에 없었다. 소주에서 롄윈강까지 버스로 6시간 거리다.
난생처음 케이지에 넣었더니 이놈이 겁을 먹고 눈만 껌벅거리면서 애원하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애처롭던지.
중간에 두 번 쉬었는데, 그 때마다 꺼내서 풀어주자, 이놈은 지옥에나 갔다 온 듯이 좋다고 난리였다.
물을 먹이고 볼 일을 보게 하고 다시 태웠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컴컴한 짐칸에서 3시간씩 차를 타고 가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지만 롄윈강에 도착했을 때는 언제 그랬냐 싶게 그놈은 기운차게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그렇게 롄윈강에서 산 지 1년 정도 됐을 때 회사가 여의치 않아 다시 소주로 오게 되었다.
또 그 지옥 같은 버스 여행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똘이는 컴컴한 짐칸에서 1년 사이에 두 번씩이나 6시간씩 그렇게 고생을 했던 것이다.
아마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컴컴하고 덜컹거리는 짐칸에서 6 시간을 견뎌내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그 아이의 신경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니었을까? 안타깝고 후회되는 일이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할걸!
이 병은 틀림없이 그때 시작된 것이리라.
말도 못 하고 오로지 나만 믿고 살아온 놈인데, 내 잘못인 것이다. 나의 잘못된 선택.
좋은 곳에서 잘 살아야 돼!
롄윈강을 갔다 온 후, 2015년 어느 날 우리 집 오는 손님이 똘이가 이상한 짓을 한다고 하길래 가서 보니까, 부들부들 떨면서 정말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그때 그게 시작됐던 것이다.
병원에 데리고 갔다. 초기지만 개 간질인데, 개발된 치료제가 없으며 지금은 진행을 늦추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너무 낙심했지만 가능한 대로 치료를 해 보라고 했다. 치료비도 꽤 들었다. 두어 차례 갔는데 3000원(한화 50+만원) 정도. 똘이의 병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똘이는 그 후로도 그렇게 산발적으로 발작을 하면서도 몇 년을 더 같이 살았다.
병원에서는 여전히 다른 치료 없이 그냥 진정제 같은 것만 투여했다.
어떤 때는 한 주에 한 번도 발작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 때는 아주 희망적인 기대를 하면서 좋아했다.
그러나 어김없이 마지막은 다가오고 있었다.
나중에는 한 주에 3번씩,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나도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을!
나는 안락사도 생각해 봤지만 병원에서는 오히려 더 지켜보자고 권고했다.
사실 안락사 시키는 것은 나 자신도 허락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똘이는 어느 날 하늘로 갔다.
나만, 아줌마랑 나만 남겨 놓고.
거실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우리는 내가 자주 다니는 산책 길가에 똘이를 묻어 주었다.
사진을 찍어서 묻힌 지점을 훗날 기억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
그 뒤로도 나는 2~3년 동안 똘이 생각이 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말 못 하는 놈이 나만 믿고 살았는데.
좀 더 잘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다른 병원에서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을까?
이제 그렇게 보낸 지도 6년이 넘었다. 아픔도 점점 가라앉아 간다.
“똘이야, 하늘나라에서 아프지 말고 잘 지내렴!”
그 뒤로 주위에서 개를 다시 키워보라는 권고도 있었지만 나는 절대 키우지 않기로 했다.
다시는 깊은 정을 들이고 그 정 때문에 앓고 싶지 않다.